제가 누구에게 반하건 누가 제게 반하건, 이 반한다는 말은 너무도 천박하고, 분별없고, 그야말로 자아도취적인 느낌이라 제 아무리 '엄숙한' 자리라도 그 자리에 이 말 한마디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면 순식간에 우울의 사원이 무너지고 그저 밋밋한 폐허가 되어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자꾸 내게 반해서 오는 괴로움'같은 속된 표현이 아니라, '사랑받는 불안'같은 식의 문학적인 표현을 쓰면 또 우울의 사원이 무너지지는 않을 것 같으니 참 묘한 노릇입니다.
참 부끄러운 생애를 보내 왔습니다.
인간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 그러니 일해서 먹고 살아야 한다는 말만큼 저에게 난해하고 막연하며, 또한 협박 같은 여운을 주는 말도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생각해 낸 게 광대 짓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향한 제 마지막 구애였습니다.
뭘 갖고 싶으냐는 질문을 받으면 순간 아무 것도 갖고 싶지 않게 됩니다. 뭐든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날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는데, 하는 생각이 꿈틀거립니다.
하지만 이런 건 어디까지나 아주 작은 한 예일 뿐입니다. 서로 기만하면서도 신기하게 아무도 상처 입지 않으며, 그렇게 기만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실로 눈부신, 그야말로 맑고 밝고 명랑한 불신의 예가 인간의 삶에 충만해 있습니다.
제가 누구에게 반하건 누가 제게 반하건, 이 반한다는 말은 너무도 천박하고, 분별없고, 그야말로 자아도취적인 느낌이라 제 아무리 '엄숙한' 자리라도 그 자리에 이 말 한마디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면 순식간에 우울의 사원이 무너지고 그저 밋밋한 폐허가 되어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자꾸 내게 반해서 오는 괴로움'같은 속된 표현이 아니라, '사랑받는 불안'같은 식의 문학적인 표현을 쓰면 또 우울의 사원이 무너지지는 않을 것 같으니 참 묘한 노릇입니다.
"여자한테 받은 연애 편지로 물을 데워서 목욕을 한 남자가 있다더군요."
"어머, 너무해. 당신이죠?"
"우유를 데워 마신 적은 있지요."
여자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저만 살아 남았습니다.
저는 남들이 저를 좋아해 준다는 건 알지만 남을 사랑하는 능력에는 결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하기는 세상 사람들 역시 진정한 '사랑'의 능력이 있는지 큰 의문이긴 합니다.)
타인,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타인, 비밀투성이의 타인, 시게코의 얼굴이 갑자기 그렇게 보였습니다.
두꺼비.
'그게 나야. 세상이 용납하고 말 것도 없어. 매장하고 말 것도 없지. 나는 개나 고양이보다 못한 동물이야. 두꺼비. 어기적 어기적 꿈틀대고 있을 뿐이야.'
때 묻지 않은 신뢰감은 죄가 되는가.
유일한 희망이었던 미덕에까지 의혹을 품게 되면서 저는 이제 세상 만사를 알 수 없게 되어 그저 술에만 매달렸습니다.
죽고 싶다, 차라리 죽고 싶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무슨 일을 해도, 어떤 짓을 해도 점점 더 나빠질 뿐이다. 부끄러움에 부끄러움을 덧칠하게 될 뿐이다. 자전거를 타고 아오바 폭포에 간다니, 나 따위는 바라서도 안 될 일이다, 그저 추잡스런 죄에 한심스런 죄가 겹치고 고뇌는 커져 강렬해질 뿐이다.
죽고 싶다, 죽어야만 한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죄의 씨앗이다. 이런 생각들로 몸부림치는 와중에도 집과 약국 사이를 반미치광이 꼴로 오락가락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불행은 거부할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습니다. 권하는 것을 거부하면 상대의 마음에나 제 마음에나 영원히 메울 수 없는 커다란 골이 생길 것 같은 공포심에 떨고 있었던 겁니다.
신께 묻습니다. 무저항은 죄가 되나요?
인간, 실격.
이제 저는 완전히 인간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폐인'이란 아무래도 희극 명사인 모양입니다. 잠을 자겠다고 설사약을 먹고, 그나마도 그 설사약 이름이 헤노모틴이라니. 지금 저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 세상에서 딱 하나 진리 같다고 느낀 것은 그것 뿐이었습니다.